아무리 작가라 하더라도 살아보지 않은 인생,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생생히 묘사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때문에 드라마 작가들은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가기 전에 실제 사례와 인물을 철저히 연구하며 공부하는 시간을 갖죠. 이때 캐릭터에 바로 반영할 수 있을 만큼 드라마틱 한 인생을 산 모델이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텐데요.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받은 드라마 중에는 이렇게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 존재하는 경우가 적지 않죠. ‘올인’의 김인하(이병헌 분), ‘응답하라 1988’의 최택(박보검 분), ‘종합병원’의 김도훈(이재룡 분)도 실존 인물을 모델로 탄생한 캐릭터라고 하는데요. 이들 캐릭터에 영향을 준 인물은 누구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생이 드라마, 이병헌 실제 모델 차민수


2003년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올인’은 프로 갬블러들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대결과 우정, 사랑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일반적인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했던 프로 도박사, 카지노 딜러라는 직업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죠. 이병헌 씨가 연기한 김인하는 불우하고 거친 어린 시절을 보내다 포커학 교수를 알게 되며 도박의 세계를 접하고, 세계 포커 선수권에서 우승까지 차지하는 인물인데요.

김인하 캐릭터의 실제 모델은 바둑 기사로 시작해 프로 도박사가 되었다가 다시 바둑계로 돌아온 차민수 5단입니다. 그의 인생은 ‘올인’ 속 김인하와 닮은 점도 많고, 심지어는 더 드라마틱 하기까지 한데요. 어린 시절 극장 주인의 아들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1974년 프로 바둑 기사로 입단하지만, 이런저런 사고를 치며 부모님 속을 썩이는 바람에 76년 쫓겨나다시피 미국으로 떠납니다. 미국에서 그는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인생의 어려움을 겪는데요. 주유소 직원으로 일하며 생활비를 버는 한편 마약에 빠지기도 하고, 아내와 이혼도 하게 되죠.

아이들을 맡아 키울 아내에게 재산을 모두 주고 빈털터리가 된 그는, 수중에 얼마 남지 않은 돈을 불려 장사를 시작하려는 심산으로 카지노로 향합니다. 캘리포니아주립대 포커학 교수 치프 존슨으로부터 포커를 배웠던 이력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프로 바둑 기사가 미국에 왔다는 것을 안 존슨 교수가 차민수 씨를 찾아내, 바둑을 배우는 대가로 포커를 가르쳐줬던 겁니다.

수년 전에 포커를 배운 것만으로 카지노에서 승부를 보기란 어려웠겠죠. 계속되는 패배로 수중에 150 달러만 남긴 상황에서, 포기하고 자리를 뜨려는 찰나 차민수 씨는 천 달러를 따게 됩니다. 이후 손이 풀린 그는 매일 천 달러가량을 벌어들이며 삼만 불까지 모았고, 3년 차에는 연간 100만 달러(약 11억 5천만 원)의 수입을 기록합니다. 괄목할 만한 성과였지만,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세계 일류 도박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은 그는 97년 은퇴할 때 세계 랭킹 3위, 수입 랭킹 1위 타이틀을 거머쥐었는데요. 당시 그의 한 해 수입은 400만 달러(약 46억 원)이었죠. 이후 도박사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차민수 씨는 현재 다시 바둑 기사로 활동 중입니다.


중국도 인정한 ‘신급’ 바둑 기사, 이창호 9단


2015년 방영된 tvN ‘응답하라 1988’은 2·30대와 중장년층 모두에게 두루 인기를 끌었습니다. 향수를 자극하는 물건과 노래, 그리고 청춘 남녀의 로맨스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스토리가 인기의 비결이었죠. 천재 바둑 기사이자 덕선이의 남편이 된 ‘택이’는 평소에는 살짝 어리바리하지만 대국할 때만큼은 진지하고 승부욕 넘치는 모습으로 여성 시청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는데요.

비교적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배우 박보검이 연기한 택이 캐릭터의 모델은 이창호 9단입니다. 11세에 프로 입단, 13세에 바둑왕전에서 우승하며 최연소 타이틀 획득, 16세에 제3기 동양증권배 최연소 세계 챔피언 등극 등 어린 나이에 화려한 기록을 달성한 점이 응팔 속 최택과 유사하죠.

특히 최택이 중국 선수들을 모두 물리치고 한국에 5연승을 안기는 장면은 2005년 농심배 국가 대항전에서 중국 선수를 5연승으로 이겼던 이창호 9단의 이력을 떠올리게 합니다. 스승인 조훈현을 내리 3판 꺾고, 거물 조치훈에게 3:0 승리를 거머쥐기도 한 이창호는 한국 바둑 사상 최초의 특별 점프 승단의 주인공이기도 한데요. 1996년 11월, 점프 승단 규정도 없는 상태에서 7단에서 9단으로 바로 승단해 화제를 모았죠. 이창호의 명성과 실력에 중국에서는 “그에게 지는 것은 한국에 지는 것이 아니다. 신은 인간보다 위대함을 알려줄 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창호 9단은 자신의 바둑 인생을 반영한 ‘응답하라 1988’의 애청자였다고 하는데요. 과묵한 성격, 바둑에 대한 천재적인 감각 등 택이와 닮은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긴장을 풀기 위해 몰래 흡연하던 최택과 달리 이창호 9단은 지금까지 담배를 입에 문 적이 없다고 하네요.


드라마 집필에 직접 참여, 이왕준 명지의료재단 이사장


1994년부터 1996년까지, 꽤 오랜 시간 방송한 MBC ‘종합병원’은 한국 메디컬 드라마의 원조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재룡, 전광렬, 신은경, 김지수 등 당대의 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이 드라마에는 풋풋한 모습의 전도연 씨가 간호사 역할로 등장하기도 했죠. 이 드라마에서 이재룡 씨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 의사가 된 주인공 김도훈 역을 맡았는데요. 냉철한 이성을 중시하는 백현일(전광렬 분)과 달리 따듯한 가슴을 가진 휴머니스트 캐릭터였죠.

김도훈 역할의 실제 모델은 이왕준 명지의료재단 이사장입니다. 서울대 의대 재학 중 운동권 생활을 하다 6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28살의 나이로 의료개혁을 위해 신문 <청년 의사>를 창간하는 등 다양한 활동에 몸담아온 이왕준 이사장이 ‘종합병원’ 제작 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은 외과 레지던트 시절의 일이죠. 그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드라마 제작과 대본 집필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20부작 드라마 시놉시스를 미리 써둔 데다 최완규 작가와 합숙까지 해가며 대본을 집필했다니, 드라마 ‘종합병원’에는 이왕준 이사장의 실제 경험이 많이 녹아들어 있겠네요.

전문의가 된 이후에도 그는 의료계 환경 개선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체계적인 의료 보장을 위해 이주 노동자 의료공제회를 발족했고 IMF 때는 부도난 병원을 인수해 400개 병상을 갖춘 종합 병원으로 키워냈죠. 2009년에는 명지병원 의료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국내 최연소 대학병원장 타이틀을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