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직장인들은 옷장 앞에서 한참을 망설입니다. 재빠르게 아무거나 꿰어 입고 출근해도 모자랄 판에 옷을 고르는 데에 이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게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출근 룩’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8시간 동안 앉아서 근무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편안해야 하니까요. 혹시 잡힐지 모를 저녁 약속에서 주목을 받을 수 있게 세련되고 멋지기까지 하다면 금상첨화겠죠.

전에는 출근 복장으로 청바지를 금기시하는 회사도 많았지만, 최근에는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나날이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한국 날씨 때문인지 젊은 경영자들이 이끄는 스타트업이 많아져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금융업이나 영업직 등 일부 직종을 제외하고는 청바지를 문제 삼는 경우는 흔치 않죠. 이제는 청바지보다 한 끗 더 과감한 하의 아이템도 출근 룩으로 애용하는 직장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인데요.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레깅스입니다.

한땐 남의 나라 이야기


‘하의로 딱 붙는 레깅스 하나만 입는다’는 발상이 완전히 황당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절도 물론 있었습니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사진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공유하기 시작한 이천 년대 초반, 예쁜 블라우스에 레깅스만 덜렁 입은 해외 여배우들의 사진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충격을 주었죠. 트렌드에 가장 민감한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여성들은 “왜 저렇게 입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거나 “유행이라도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스타일”이라는 반응을 주로 보였습니다.

미국·유럽 등지에서 ‘레깅스 패션’은 연예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배낭여행 중 현지 공원이나 강변을 거닐어 본 한국 대학생들은, 딱 붙는 레깅스에 브라탑만 입고 조깅하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했죠. 이 역시 당시 한국 분위기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차림이었습니다. 레깅스에 브라탑 차림으로 밖을 뛰어다니는 건 속옷만 입고 밖에서 운동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죠.

기능성 운동복으로


그럼 당시 한국 여성들은 운동할 때 뭘 입었냐고요? 1990년대 후반까지는 넉넉한 품에 발목 부분이 밴딩 처리되어 있는 조거 팬츠 스타일이 일반적이었습니다. 2천 년대 초반부터는 부츠컷 형태의 트레이닝팬츠가 인기를 끌었죠. 골반 쪽은 타이트하지만 아래는 충분한 폭을 줘, 레깅스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덜 민망한’ 룩이었습니다.

변화는 이천 년대 후반쯤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무작정 마른 몸매를 추구하던 이전과 달리 ‘균형 잡힌 건강한 몸매’를 가꾸려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일반인들이 도전하는 운동의 종류도 다양해졌는데요. 특히 요가나 필라테스처럼 정확한 자세를 요구하는 운동에는 몸에 완전히 밀착된 복장이 적합하기 때문에, 레깅스 형태의 운동복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죠. 이런 운동의 경우 여성 수강생들로만 이루어진 수업이 흔하다는 것도 레깅스 착용의 부담을 덜어주었습니다.

레깅스가 평상복이 되기까지


그렇다고 해서 ‘쫄바지’라고도 불리는 레깅스를 일상복으로 아무렇지 않게 입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레깅스의 평상복 활용법은 겨울철 짧은 치마 아래 스타킹 대신 입는 정도였죠. 치마와 레깅스 모두를 챙겨 입는 게 귀찮은 사람들을 위해 아예 고무줄 치마가 달린 레깅스가 보세 숍을 휩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스마트폰, SNS의 등장으로  세계 각지의 트렌드가 거의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시대가 열리자 ‘운동복’이나 ‘스타킹 대용’ 정도로 대우받던 레깅스의 국내 위상도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자칫 민망할 수 있는 히프 라인이나 와이존을 커버한다는 조건 하에 ‘편안한 단일 하의’로 청바지 대신 레깅스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요.

사실 청바지는 편안한 옷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소재가 딱딱하고 두꺼운 데다 타이트한 디자인이 많아, 과식이 예상되는 날 여성들이 기피하는 1순위 아이템이기도 하죠. 반면 부드럽고 쭉쭉 늘어나는 소재에 고무줄 허리로 구성된 레깅스는 이런 불편함을 모두 해소해주는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애슬레저 룩 트렌드의 등장


편하다는 것이 레깅스의 유일한 매력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사랑받지는 않았을 겁니다. 운동복 차림을 ‘성의 없고 예의 없는 차림’으로 보는 시선이 여전했다면 말이죠. ‘애슬레저 룩(Athleisure Look)’으로 이름 붙여진 최근의 트렌드는 스포츠 웨어와 평상복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차림이 쿨해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애슬레저 룩을 주로 선호하는 세대는 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의 밀레니얼들인데요. 이들은 기성세대가 중요시하던 ‘사회적 성공’이나 ‘격식’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습니다. 패션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닌지라, 화려한 옷 대신 스스로 편하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죠. 애슬리저 룩에 레깅스만 있는 건 아닙니다. 패션에 관심이 전혀 없는 아빠들이나 신을 법한 울퉁불퉁 ‘어글리 스니커즈’나 속에 히트텍 3 장은 무리 없이 껴입을 수 있는 ‘오버사이즈 후디’ 역시 밀레니얼들의 사랑을 받는 애슬레저 룩 아이템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출근 룩으로 ‘쫄바지’는 좀 부적절한 거 아니냐고요? 회사 분위기나 구성 연령층, 맡고 있는 직무에 따라 다르겠지만 레깅스를 출근 복장으로 활용하는 예도 분명 있습니다. 이들은 레깅스 위에 반바지를 착용하거나, 길이가 긴 오버사이즈 상의를 입어 자칫 민망할 수 있는 라인은 가리는 방식을 택하죠. 레깅스를 입고 회사에 간다는 건, 밀레니얼의 부모님 세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텐데요. 갓 스무 살이 된 2000년생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할 즈음에는 또 어떤 종류의 새로운 ‘출근 룩’이 등장할지 궁금해지네요.